그리고리 테플로프와 무젤로주스트보 사건
아홉 명의 농노가 주인을 강간 혐의로 고발하다.

“그를 자기 침대로 불러 처음에는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보상을 약속하다가, 끝에는 구타하겠다고 위협하며 자신에게 무젤로주스트보를 행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자신의 주인이자 국가 관료인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러시아어: Grigory Nikolayevich Teplov; Григорий Николаевич Теплов)를 ‘무젤로주스트보’와 강간 혐의로 고발한 농노의 심문 조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사건의 조사 자료는 2013년 역사학자 미하일 오소킨(러시아어: Mikhail Osokin; Михаил Осокин)이 학계에 소개할 때까지 2세기 넘게 비밀수사국(러시아어: Tainaya ekspeditsiya; Тайная экспедиция)의 기록 보관소에 잠들어 있었다.
18세기에 테플로프는 참으로 이례적인 경력을 쌓았다. 가난한 배경에서 출발하여 궁정의 저명한 인물이 된 것이다. 재판 자체와 그 결과를 살펴보기 전에, 테플로프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해 보자.
“… 그의 악덕은 소년들을 사랑했다는 것이고, 그의 미덕은 표트르 3세를 교살했다는 것이다.”
— 베네치아의 모험가이자 작가 자코모 카사노바(이탈리아어: Giacomo Casanova), 《내 인생의 이야기》
어린 시절과 청년기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는 프스코프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비화를 즐겼던 테플로프는 생전 문서에 1714년 또는 1716년이라고 적었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러시아어: Aleksandro-Nevskaya lavra; Александро-Невская лавра) 라자레프 묘지(러시아어: Lazarevskaya usypalnitsa; Лазаревская усыпальница)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1711년이 새겨져 있다.
테플로프의 아버지는 난로를 데우고 수리하는 화부(러시아어: istopnik; истопник)로 일했다. 테플로프라는 성은 이 직업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그리고리의 진짜 아버지가 프스코프의 주교이자 훗날 매우 영향력 있는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된 페오판 프로코포비치(러시아어: Feofan Prokopovich; Феофан Прокопович)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표트르 대제 시대의 지식인이자 교육 조직가였다. 이 설에 따르면, 고위 성직자가 독신 서약 위반을 숨기기 위해 사생아를 화부에게 맡겨 키우게 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프로코포비치가 소년에게 쏟은 막대한 관심과 자금으로 간접적으로 뒷받침된다. 테플로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르포프 저택(러시아어: Karpovskoye podvorye; Карповское подворье)에 있는 엘리트 주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후원자의 사재로 식물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로이센으로 떠났다.
돌아온 후 그는 학계에 입문했다. 1741년 또는 1742년에 테플로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에 들어가 부교수(러시아어: adyunkt; адъюнкт, 교수의 조수) 직을 받았다. 그는 식물학을 연구하는 동시에 크리스티안 볼프에 대한 강의를 했다. 이 독일 사상가는 당시 유럽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명제들이 일관되게 도출되는 엄격한 시스템으로 철학을 구축하려 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18세기의 많은 학생과 관리들에게 볼프주의는 과학에 입문하는 편리한 방법이 되었다.
공직 생활과 병행하여 테플로프는 그림도 그렸다. 프로코포비치의 학교에서는 회화를 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다. 오늘날 그의 작품 4점이 알려져 있는데, 하나는 에르미타주에 보관되어 있고 세 개는 모스크바의 쿠스코보 영지 박물관(러시아어: muzey-usadba Kuskovo; музей-усадьба Кусково)에 있다.
테플로프는 그려진 사물들이 실제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눈속임(러시아어: obmanki; обманки, 프랑스어 trompe-l’œil에서 유래)’ 스타일의 정물화를 그렸다. 그러나 그림은 그의 주된 직업이 되지 못했다. 테플로프의 이후 경력은 위험한 정치적 음모와 얽히게 되었다.
1740년 그는 국가 반역 음모로 기소된 내각 대신 아르테미 페트로비치 볼린스키(러시아어: Artemy Petrovich Volynsky; Артемий Петрович Волынский)의 사건에 연루되었다. 증거 중에는 볼린스키 가문의 계보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 이는 가문과 류리크 왕조(러시아어: Ryurikovichi; Рюриковичи)의 연관성을 강조하여 왕위 계승권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볼린스키가 테플로프에게 이 그림의 제작을 의뢰했다.
테플로프는 처벌을 피했다. 그림은 제때에 파기되었고, 테플로프는 자신의 개입이 순전히 기술적인 것에 불과했음을 증명해 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다른 음모자의 감독하에 연필로 가계도를 스케치했을 뿐이었다. 볼린스키는 처형되었지만, 테플로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과학 아카데미의 수장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총신이었던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라주몹스키(러시아어: Alexei Grigorievich Razumovsky; Алек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Разумовский) 백작은 테플로프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여 열다섯 살 난 동생 키릴의 교육을 그에게 맡겼다. 테플로프는 소년의 스승이 되었고, 두 사람은 함께 유럽으로 교육 여행을 떠났다. 키릴은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괴팅겐에서 공부했고, 이후 그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1745년 봄, 여행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고, 불과 1년 뒤 18세의 키릴이 러시아 제국 최고의 과학 기관인 과학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토록 이른 임명은 소년의 공로가 아니라 궁정에서 그의 형이 가진 막대한 영향력 덕분이었다.
형식적으로 아카데미는 키릴 라주몹스키가 이끌었지만, 실질적인 관리는 테플로프의 손에 집중되었다. 여러 주요 직책을 차지한 그는 모든 핵심 결정을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라주몹스키는 그가 준비한 서류에 서명만 할 뿐이었다. 테플로프는 마치 아카데미를 자신의 개인 영지인 것처럼 행동했다.
아카데미 회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테플로프는 형편없는 지도자였다. 관리자는 과학계의 갈등을 진정시킬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테플로프는 오히려 적대감을 부추겼고 자신도 끊임없이 교수들과 다투었다.
어느 날 아카데미에 학자들을 조롱하고 테플로프 본인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익명의 팸플릿이 등장했다. 시인 바실리 키릴로비치 트레디아콥스키(러시아어: Vasily Kirillovich Trediakovsky; Василий Кириллович Тредиаковский)가 저자라고 의심한(문체를 알아봤다고 함) 테플로프는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공식 불만 제기에 그치지 않고, 시인을 불러들여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 관리자의 가장 첨예하고 길었던 갈등은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로모노소프(러시아어: Mikhail Vasilyevich Lomonosov;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Ломоносов)와 벌어졌다. 이 과학자는 끊임없는 다툼에 너무 지친 나머지 여제에게 아카데미를 ‘테플로프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권력자의 궁정 인맥이 더 강했다. 로모노소프의 불만은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했고, 동료들은 체념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개적인 대립은 잦아들었지만, 테플로프에 대한 무언의 불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소러시아(말로로시야)에서의 공직 생활
라주몹스키 형제는 코사크 출신이었다. 1750년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키릴 라주몹스키를 말로로시야(러시아어: Malorossiya; Малороссия, 당시 제국에서 키이우와 체르니히우 주변을 포함하는 현대 우크라이나 좌안 지역을 부르던 명칭)의 헤트만(러시아어: getman; гетман, 코사크 행정부와 군대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헤트만과 함께 그리고리 테플로프도 말로로시야로 향했다. 관방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그는 모든 문서 흐름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켰다. 법령에 대한 통제권은 테플로프를 사실상 이 지역에서 라주몹스키에 이은 2인자로 만들었다.
말로로시야에서 테플로프의 행정적 유산은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치하에서 뇌물 수수가 만연했고, 현지 농민들을 농노로 만들기 위한 기반을 다진 것도 바로 그였다. 테플로프는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헤트만 제도를 폐지하는 데 주요 이념적 근거가 된 유명한 《말로로시야의 무질서에 관한 비망록》을 작성했다. 이 문서에서 그는 코사크 지도층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고 제국의 통합을 주장했다. 역사가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솔로비요프(러시아어: Sergey Mikhaylovich Solovyov;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Соловьёв)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이 비망록은 예카테리나가 직접 주문한 것이지만, 현대 연구자들(특히 타티야나 아나톨리예브나 크루글로바)은 테플로프가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시대에 이미 작업을 시작했다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 테플로프는 바투린에 말로로시야 최초의 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고 지역 역사에 관한 자료를 꼼꼼히 수집했다. 나중에 이 정보는 이 지역에 관한 최초의 역사서 중 하나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테플로프는 우크라이나 역사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결혼과 표트르 3세와의 관계
그리고리 테플로프는 두 번 결혼했다. 그에게 두 아이를 낳아준 스웨덴인 첫 아내는 1752년에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
2년 뒤 테플로프는 키릴 라주몹스키의 조카 마트료나 게라시모브나 데메슈코스트레셴초바(러시아어: Matryona Gerasimovna Demeshko-Streshentsova; Матрёна Герасимовна Демешко-Стрешенцова)와 재혼했다. 공식적인 결혼이었지만 부부의 관계는 자유로웠다. 1756~57년에 대공 표트르 표도로비치(러시아어: Pyotr Fyodorovich; Пётр Фёдорович, 훗날의 표트르 3세)는 마트료나에게 열렬히 빠져들었다. 이 관계는 우스꽝스럽게 끝났다. 연인이 대공에게 4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보내 서면 답장을 요구한 것이다. 읽고 쓰는 것에 생리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표트르는 격노했고, 로맨스는 즉시 끝났다.
테플로프 부부의 가정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1776년 마트료나는 남편을 떠났고, 그의 말에 따르면 ‘남의 부양을 받으며’ 살았다.
예카테리나 2세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테플로프의 역할
1761년 말 왕위에 오른 표트르 3세는 옛 원한을 잊지 않았다. 1762년 3월 2일(그레고리력 13일), 테플로프는 ‘황제에 대한 불경스러운 언사’를 이유로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러시아어: Petropavlovskaya krepost; Петропавловская крепость)에 투옥되었다. 라주몹스키의 중재로 죄수는 고문을 면했다. 곧 테플로프는 풀려나 정식 국가고문관 직위를 받았지만, 황제의 바이올린 반주를 하라는 조롱 섞인 명령과 함께 즉시 해임되었다.
이러한 굴욕은 테플로프를 황제 타도를 준비하던 음모자들의 대열로 밀어넣었다. 쿠데타는 성공했다. 표트르 3세는 권력에서 축출되었고 곧 ‘갑자기’ 사망했으며, 예카테리나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음모 가담자 중 가장 교육 수준이 높았던 테플로프는 예카테리나의 즉위 선언문을 작성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역사적 전통은 또한 1인칭으로 쓰인 표트르 3세의 굴욕적인 퇴위 문서의 작성자로 그를 지목한다.
유럽의 회고록(특히 자코모 카사노바와 외교관 게오르크 폰 헬비히의 기록)에는 테플로프가 로프샤에서 폐위된 군주를 교살하는 데 직접 참여했다는 신화가 뿌리내렸다. 현대 학계는 그의 살해 직접 가담을 부인하며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오를로프(러시아어: Alexei Grigorievich Orlov; Алек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Орлов)와 표도르 세르게예비치 바랴틴스키(러시아어: Fyodor Sergeyevich Baryatinsky; Фёдор Сергеевич Барятинский)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테플로프가 이 참극의 주요 이념적 배후라는 소문은 확고히 자리 잡았다.
“전체 국가에서 가장 기만적인 사기꾼으로 모두에게 인정받는 자이다. 그러나 매우 영리하고, 환심을 잘 사며, 탐욕스럽고, 유연하여 –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에든 쓰일 준비가 되어 있다.”
— 오스트리아 대사 플로리몽 클로드 드 메르시다르장토 백작, 외교 전문에서
쿠데타 가담은 테플로프를 경력의 정점으로 이끌었다. 그는 2만 루블과 여러 고위 정부 직책을 받았고, 예카테리나 대제와 정기적으로 만찬을 함께하며 그녀를 위한 국가 개혁안을 기안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63년, 이 총신을 상대로 전례 없는 무젤로주스트보 사건이 제기되면서 그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농노에 대한 소도미 고발 사건
아홉 명의 농노가 주인 그리고리 테플로프를 다년간의 성폭력 혐의로 고발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6년 동안 당시 문서에서 ‘무젤로주스트보’라 불린 행위를 하인들에게 강요했다. 농민들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힘을 합쳐 집단 청원서를 냈다.
청원서(러시아어: chelobitnaya; челобитная)는 이반 페르필리예비치 옐라긴(러시아어: Ivan Perfilyevich Yelagin; Иван Перфильевич Елагин)이 이끄는 여제의 ‘고충 처리실’로 보내졌다. 옐라긴은 이 문제를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서류를 덮어두는 쪽을 택했다. 아마도 영향력 있는 고위 관리 주변의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한동안 이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으나, 곧 테플로프의 아내가 이를 알게 되었다.
마트료나 테플로바는 피해자 중 한 명의 친척으로부터 청원서 사본을 받았다. 그녀는 충격을 받아 ‘큰 슬픔에 잠겨 울었고’, 이후 고발의 진위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농노를 불렀다. 머지않아 키릴 라주몹스키 역시 이 스캔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물론 그가 이전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발 사실을 알게 된 테플로프는 반란자들과 일대일로 대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들을 차례로 침실로 불러들여 추가적인 행동을 만류하려 했다. 농민들에 따르면, 주인은 자신이 영향력 있는 관리이자 여제의 측근이므로 어찌 되었든 처벌을 피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고발자들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보복이 따를 것임을 상기시켰다. 농노들에게는 거의 아무런 권리가 없으며, 수사관과 법원은 항상 ‘하인’보다 ‘주인’의 말을 더 쉽게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로 미루어 볼 때, 테플로프는 위협했다기보다는 냉소적으로 사실을 적시하며 사건의 진행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 어떻게 감히 나에 대한 청원서를 옐라긴에게 제출할 수 있단 말이냐. 여제께서 나를 총애하신다는 것을 너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유용한 사람이고, 여제께서는 당신의 사람 중 하나를 잃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하인보다는 나의 말을 더 믿을 것이다. […] 그리고 그들이 너희를 심문하러 데려가자마자 너희를 고문하기 시작할 것이다. 설령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묻더라도, 나는 너희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고발했다고만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너희가 죽을 때까지 고문할 것이다.”
— 비밀수사국 수사 기록에 나타난 농민들의 진술에 따른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의 말
공식적인 조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테플로프는 농노들이 거짓 증언을 하도록 회유하려 했다. 그는 다른 버전을 제시했다. 즉, 그들이 주인이 어떤 ‘계집’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실수로 그를 고발했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심각한 폭력 혐의를 덜 위험한 허위 밀고로 바꿀 수 있었다. 테플로프는 그러한 중상모략에 대한 처벌은 비교적 가벼울 것(예: 일반적인 채찍질)이라고 장담했다. 그 대가로 그는 원하는 모든 이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겉으로 농민들은 동의하며 지어낸 버전을 확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몰래 예카테리나 2세에게 직접 새로운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제는 이 사건을 원로원 산하 비밀수사국으로 넘겼다. 이는 스테판 이바노비치 셰시콥스키(러시아어: Stepan Ivanovich Sheshkovsky; Степан Иванович Шешковский)가 이끄는 최고 정치 경찰 기관이었다. 이 부서는 주로 국가 범죄와 같은 매우 중요한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다.
수사와 농노들의 증언
수사 자료에는 ‘스크베르노데이스트비예(러시아어: skvernodeystvie; сквернодействие, 추잡한 행위)‘라는 단어와 ‘뺨 뒤로 추잡한 짓을 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이는 구강성교를 가리키는 비밀수사국의 공식 관료 용어였다.
가장 먼저 증언한 사람은 블라스 코체예프(러시아어: Vlas Kocheyev; Влас Кочеев)였다. 그는 이전에 키릴 라주몹스키의 소유였으나, 성인이 된 후 카메르디네르(러시아어: kamerdiner; камердинер, 독일어 Kammerdiener - ‘방 하인’에서 유래)로서 테플로프에게 넘겨졌다. 그의 임무에는 주인의 일상적인 시중이 포함되었다. 그는 옷장을 관리하고, 면도와 목욕을 도우며, 여행에 동행했다. 코체예프는 결혼한 상태였으나, 결혼이 주인의 괴롭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주지는 못했다. 심문에서 그는 일어난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테플로프는 그를 괜찮게 대우해주었으나, 그가 20세가 되던 해 여름, […] 그는 침실에서 테플로프와 함께 잤다. 테플로프는 그를 침대로 불러 처음에는 어루만지며 보상을 약속했고, 끝에는 구타로 위협하며 그에게 무젤로주스트보를 저지르도록 강요했다. […] 그리고 그 외에도 테플로프는 그에게 ‘볼 안에다’ 그런 더러운 짓을 하도록 시켰으며, 구타가 두려웠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지시를 따랐고, 그 대가로 테플로프는 그(코체예프)에게 돈과 옷으로 보상했다.”
— 비밀수사국 수사 기록 자료에서
농민들에 따르면, 테플로프는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특히 사제들에게 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코체예프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죄를 두려워했다. 어느 날 그는 말로로시야에서 마침내 고해성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말을 들은 사제는 청년에게 에피티미아(러시아어: epitimya; епитимья, 종교적 징벌)를 부과하여 300일 동안 교회 출입을 금지했다.
보아하니 코체예프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고, 나중에 그는 모스크바의 한 사제에게서 영적 정화를 찾으려 했다. 그 사제는 놀랍게도 고백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하인의 고뇌를 알게 된 테플로프 본인은 이렇게 선언했다.
“[…] 거기에는 아무런 죄가 없고, 그것은 멍청한 사제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지어낸 것일 뿐이다. 그리고 네가 무언가를 말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믿지 않을 것이며, 나는 네가 미쳤거나 정신이 나갔다고 말할 것이다.”
— 비밀수사국 수사 기록에 나타난 농민들의 진술에 따른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의 말
나머지 피해자들의 증언도 여러모로 비슷하다. 비밀수사국의 수사관들은 이를 표준적인 관료 용어로 기록했으며 생리적인 세부 사항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죄가 금식일에 저질러졌는지 여부와 외부인 중 누가 그 사건을 알고 있었는지 등 수사에 형식적으로 중요한 정황에 집중했다.
농노들에 따르면, 주인은 정해진 패턴에 따라 행동했다. 처음에는 일에 트집을 잡고, 그다음에는 구타 위협으로 넘어가 복종을 얻어냈으며, 그 후 때때로 피해자에게 돈이나 옷을 주었다.
청원서를 제출하기 전, 농민들(그들은 모두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은 자신들의 증언이 일치하고 일관성 있게 보이도록 기록을 교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에피소드의 차이는 피해자의 성격에 따라 압박 방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7세의 풋맨 알렉세이 세묘노프(러시아어: Alexei Semyonov; Алексей Семёнов)가 모스크바의 교회에서 고해성사를 했다고 알리자 테플로프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이로 미루어 고위 관리가 권력의 매개체로서 사제를 두려워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고해성사로 인한 폭로 자체가 그를 물러서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심문받은 사람은 라주몹스키 백작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던 22세의 알렉세이 야노프(러시아어: Alexey Yanov; Алексей Янов)였다. 폭행 후 테플로프는 그에게 경고했다. 만약 하인이 고해성사를 하러 간다면 참회를 위해 수도원으로 유배될 사람은 바로 야노프이며, 테플로프 자신에게는 ‘아무런 수치도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위협에도 불구하고 야노프는 모스크바의 사제를 찾아갔지만, ‘그 사제는 그에게 가능한 한 그 일에서 멀어지라고 말했다’.
네 번째로 증언한 사람은 말로로시야 출신의 24세 이반 티하노비치(러시아어: Ivan Tikhanovich; Иван Тиханович)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테플로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라주몹스키의 집 침실에서 그를 강간했다.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 주인은 청년에게 백작의 집에서는 이런 일이 흔한 일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넌 젊은 놈이니, 네 마음속으로 주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다. 이건 그저 계집을 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남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을 뿐이지. 게다가 키릴 그리고리예비치 백작의 집에는 노래하는 자와 음악가들이 많은데, 그들이 다 어디서 자기들을 위한 계집을 찾겠느냐, 내 생각에는 그들도 서로를 범할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나 혼자만 하는 짓이 아니다, 다른 자들도 다 하는 짓이니 너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다.”
— 비밀수사국 수사 기록에 나타난 농민들의 진술에 따른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의 말
다섯 번째 피해자인 19세 바실리 로바노프(러시아어: Vasily Lobanov; Василий Лобанов)의 이야기는 그 노골성으로 눈에 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강압 행위는 그가 주인에게 차를 대접하던 식탁에서 바로 일어났다.
“… […] 그 테플로프의 집에서 일하면서, 그에게 차를 내왔다. 그러자 단둘이 있게 된 테플로프는 그의 은밀한 부위를 꺼내 말라키아(러시아어: malakiya; малакия, 자위)를 했고 […] 그 후 테플로프는 그에게 볼 안에다 그런 더러운 짓을 하도록 시켰으며, 그래서 구타가 두려워 그 역시 그 짓을 했고, 그 대가로 테플로프는 로바노프에게 돈과 옷을 보상으로 주었다…”
— 비밀수사국 수사 기록 자료에서
나머지 네 명의 농노는 끝내 심문받지 못했지만, 고소장은 그들의 이름으로도 제출되었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는 내가 사제들보다 더 잘 안다.”
— 비밀수사국 수사 기록에 나타난 농민들의 진술에 따른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의 말
사건의 결말은 고발자들 자신에게 비극적으로 끝났다. 이는 테플로프가 처음부터 그들에게 예견했던 바였다. 최종 결정은 예카테리나 2세가 직접 내렸다. 정치적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여제는 자료를 기밀로 분류하고, 피해자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사형의 위협 하에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그 후 모든 반란자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토볼스크 수비대 연대(러시아어: Tobolskiy garnizonny polk; Тобольский гарнизонный полк)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일찍이 1715년 표트르 1세는 무젤로주스트보를 처벌하는 《군사 규정(러시아어: Voinskiy artikul; Воинский артикул)》을 반포했지만, 법적으로 이 법전은 군인에게만 적용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민간인을 위한 특별한 세속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동성 간의 관계는 도덕에 반하는 범죄로 간주되어 교회의 에피티미아 대상이 되었다. 세속 수사 기관은 심각한 폭력 사건이나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경우에만 개입했다. 이론적으로 테플로프는 예속된 사람들에 대한 폭력 혐의로 기소될 수 있었으나, 1760년대의 법령들은 농민들에게서 어떠한 법적 주체성도 체계적으로 박탈했다.
결과적으로 테플로프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더욱이 몇 년 후 그는 추밀고문관(러시아어: tayny sovetnik; тайный советник)으로 승진하고 새로운 훈장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고위 관리는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했고, 나중에 그들 사이에서 딸 마리야와 나탈리야가 태어났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제국에서 농노들이 얼마나 무권리한 상태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계몽 전제주의’ 시대에도 국가의 보호 메커니즘은 오로지 귀족의 이익을 위해서만 작동했다. 농노는 노동력이자 살아있는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전적으로 주인의 자의에 종속되어 있었다.
조사 이후 테플로프의 삶
농노 스캔들 이후 테플로프는 습관을 바꾸었고, 그 후 몇 년 동안은 동성애자가 포함된 젊은 귀족 비서들로 자신의 측근을 형성했다.
자코모 카사노바는 회고록에서 테플로프의 연인 중 한 명인 루닌(러시아어: Lunin; Лунин) 가문의 젊은 중위를 언급한다. 이 베네치아인은 그의 전체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연구자들은 그가 당시 약 17세였던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루닌(러시아어: Pyotr Mikhailovich Lunin; Пётр Михайлович Лунин,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루닌 장군의 형제이자 미래의 데카브리스틔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루닌의 삼촌)이라고 추정한다. 카사노바는 이 청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자신조차 하마터면 ‘유혹에 굴복할 뻔했다’고 묘사한다.
“… 나는 그곳에서 여행 중인 부부와 루닌 형제 두 명을 만났다. […] 동생 쪽은 완전히 소녀 같은 외모를 가진 예쁜 금발 청년이었다. 그는 내각 비서인 테플로프의 연인 중 한 명이었는데, 결단력 있는 젊은이였던 그는 스스로를 모든 편견 위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애무로 곁에 있는 모든 남자를 매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 내게 그런 취향이 있으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한 그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생각으로 그는 저녁 식사 내내 내 옆에 앉아 하도 집요하게 나를 괴롭혀서, 나는 정말로 그가 변장한 소녀인 줄로만 알았다. 식사 후, 대담한 프랑스 여성과 그 남자 옆 난롯가에 앉았을 때, 나는 그에게 내 의심을 말했다. 더 강한 성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매우 소중히 여겼던 루닌은 즉시 내 실수를 증명할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토록 완벽한 모습을 보고도 내가 무관심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그는, 내게 다가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고 확신한 후, 우리의 상호 간 지복을 위해 – 그의 표현대로라면 – 필요한 자세를 취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만약 [프랑스 여성]이 없었다면 죄를 짓고야 말았을 것이다.”
— 자코모 카사노바, 《내 인생의 이야기》
비밀수사국을 둘러싼 소문이 마침내 가라앉자, 테플로프는 조용히 정부 최고위직에서 경력을 이어갔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를 위해 행정과 경제 시스템 개혁에 관한 수많은 보고서를 준비했다.
1765년 이 고위 관리는 제국 자유 경제 협회(러시아어: Imperatorskoye Volnoye ekonomicheskoye obshchestvo; Императорское Вольное эконом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그는 김나지움(중등학교) 설립에 참여했고, 고아원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담배를 러시아 농업에 가장 먼저 도입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농민들에게 담배 재배법을 가르쳤다.
“테플로프, 부도덕하고 대담하며, 영리하고 재주가 많으며, 말과 글에 능하다.”
— 역사가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솔로비요프, 《고대부터의 러시아 역사》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는 1779년 68세의 나이에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테플로프의 유산
18세기의 많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테플로프는 백과사전주의자였다. 즉, 지식과 창작의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활동하는 폭넓은 관심사를 가진 인물이었다.
회화 외에도 그는 재능 있는 음악가로서, 그리고 러시아 로맨스(가곡)의 첫 인쇄 모음집인 《일 사이의 한가로움, 또는 다양한 노래 모음(러시아어: Mezhdu delom bezdelye, ili Sobraniye raznykh pesen; Между делом безделье, или Собрание разных песен)》(1759)의 편찬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노래들의 가사는 짝사랑, 배신, 고통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플롯은 당시 세력을 얻고 있던 ‘감상적인’ 문화의 요구에 부합했다. 테플로프의 로맨스는 오늘날까지도 연주된다.
▶️ 그리고리 테플로프 – 슬픔 속의 위안(러시아어: V otradu grusti; В отраду грусти), 로맨스 (YouTube)
“그는 훌륭한 이탈리아 방식으로 직접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도 무척 뛰어났다.”
— 아카데미 회원 야코프 슈텔린(러시아어: Jakob Stählin; Якоб Штелин), 《18세기 러시아의 음악과 발레》
또한 테플로프는 철학자이자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크리스티안 볼프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했고 자신만의 철학적 저술을 남겼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들에게 주는 교훈(러시아어: Nastavleniye synu; Наставление сыну)》(1768)으로, 저자는 여기서 도덕, 친절, 관대함에 대해 장황하게 논한다. 이 논문에서 테플로프는 공개적으로 기독교의 이상을 선언하고 볼테르주의를 비판했는데, 그는 작가 데니스 이바노비치 폰비진(러시아어: Denis Ivanovich Fonvizin; Денис Иванович Фонвизин)과의 대화에서 볼테르주의가 ‘청년들을 타락시켰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지식인 엘리트들은 이 도덕적 설교의 거짓됨을 완벽하게 느끼고 있었다. 시인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수마로코프(러시아어: Alexander Petrovich Sumarokov;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Сумароков)는 같은 제목의 신랄한 패러디를 썼는데, 거기서는 죽어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오직 악덕만을 가르친다.
“사랑, 혹은 사랑의 열정은 모든 열정 중에서 가장 즐겁고 가장 미친 열정이다. […] 사랑은 비록 눈이 멀었지만 늘 눈빛 속에 머물며, 가장 오만한 마음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굴복하고 만다.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그 존재 자체를 사랑에 빚지고 있다. 사랑은 성별도 따지지 않으며, 나이도 가리지 않는다.”
—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 《아들에게 주는 교훈》
참고 문헌 및 출처
- РГАДА. Ф. 7, оп. 2, ед. хр. 2126. [RGADA – 러시아 고대 문서 국가 기록 보관소, 폰드(Fond) 7, 인벤토리(Inventory) 2, 파일(File) 2126]
- Кочеткова Н. Д. Теплов Григорий Николаевич // Словарь русских писателей 18 века, вып. 3. [N. D. 코체트코바 – 테플로프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 《18세기 러시아 작가 사전》 제3권]
- Теплов Г. Н. Наставление сыну. 1768. [G. N. 테플로프 – 《아들에게 주는 교훈》, 1768]
- Гусев Д. В. «Обманка» Г. Н. Теплова и неизвестные факты его биографии. [D. V. 구세프 – G. N. 테플로프의 “눈속임"과 그의 전기에 숨겨진 사실들]
- Лаврентьев А. В. К биографии «живописца» Г. Н. Теплова. [A. V. 라브렌티예프 – “화가” G. N. 테플로프의 전기에 관하여]
- Смирнов А. В. Григорий Николаевич Теплов – живописец и музыкант. [A. V. 스미르노프 –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테플로프: 화가이자 음악가]
- Теплов Г. Н. // Русский биограф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в 25 т. [G. N. 테플로프 // 《러시아 인명 사전》, 전 25권]
- Осокин М. «Между делом сквернодействия» Григория Теплова. [M. 오소킨 – 그리고리 테플로프의 “추잡한 행위들 사이에서”]
- Alexander J. T. Review of Catherine the Great: Art, Sex, Politics by Herbert T. [알렉산더 J. T. – 허버트 T.의 《예카테리나 대제: 예술, 섹스, 정치》 서평]


